1890년 7월 26일, 존 헤론(John W. Heron) 별세


7월 26일 “존 헤론,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오늘은 존 헤론(John W. Heron)이 별세한 날입니다. 1890년 7월 26일, 헤론은 33세의 나이에 전염성 이질로 사망했습니다. 정신적 긴장과 과로 속에서 죽어간 헤론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부터 제일 먼저 한국선교사로 임명된 된 사람이자 양화진에 묻힌 최초의 선교사였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라고 적혀 있습니다. 마포삼열이 미국 장로교 선교부의 실행이사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귀하께 편지를 쓴 이후 우리가 염려했던 심각한 손실을 입었습니다. 헤론 의사가 토요일 아침 8시에 우리를 떠나갔습니다. 주일 오후에 그의 집에서 장례 예배를 드렸고, 월요일 오후에 서울에서 약 4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매장했습니다. 그곳은 우리가 한국 정부의 외부(外部)로 하여금 외국인 묘지를 별도로 마련하도록 하는 데 성공하여 얻은 곳입니다. 그곳은 강을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장소이며……첫 번째 외국인의 무덤은 한국인을 위해 그 생명을 바친 선교사의 무덤입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 한국인들의 큰 슬픔과, 헤론 부인에 대한 모든 사람의 동정과, 자신의 봉사에 그렇게 충실했던 이에 대한 수많은 사랑과 관심의 표현을 귀하께 글로 제대로 전할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유감입니다. 아픈 그를 간호하기 위해 많이 긴장했고 슬픈 감정을 겪은 다음이라 우리의 몸은 너무 허약하고 우리의 마음은 너무 침울해서 길게 쓸 수 없습니다.[옥성득 책임편역, 『마포삼열 서한집 제1권 1868-18994』 (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11), 119.]

1885년에 내한한 헤론은 제중원의 2대 원장으로서 봉사했으며, 성경번역을 비롯한 문서전도사역에도 이바지하였습니다. 그는 1890년에 기독교서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일반의였던 알렌과 전문의였던 헤론이 성격 및 정책적인 부분에서 갈등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헤론 선교사가 구령의 열정으로 불탔던 의료선교사였다는 것은 주지(周知)의 사실입니다. 헤론의 시대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의료의 혜택을 많이 받고 있는 시대에 사는 우리는 의식적으로 한국기독교 초기 역사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큰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합당한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까? 헤론처럼 순직한 선배들의 정신을 나의 현장에서 실천하며 삽시다. 가진 것을 기쁘게 나눕시다.

헤론은 늘 자기 집을 개방하고 손님 접대에 적극적이었다. 그의 뛰어난 의술로 병원과 진료소에서 지칠 줄 모르고 일하는 모습으로 20년 전에 수천 명의 가톨릭 개종자들이 순교를 당한 원인이었던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헤론은 한국에서 일한 5년간 약 4만 명의 환자를 치료하였다……1890년 여름에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고 있을 때, 다른 선교사들은 남한산성의 휴양지에서 가족들과 함께 휴가를 취하고 있었지만, 그는 폭염 속에서도……먼 거리를 드나들면서 환자들 치료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종은 자기의 시의(侍醫)였던 헤론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며 현재 서울 양화대교 북단 한강변에 땅 한 뙈기를 하사하면서 장례를 정중하게 치르라고 명령하였다.[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上』 (서울: 쿰란출판사, 2012), 19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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