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30일 “하디, 동료들 앞에서의 시인” 오늘은 로버트 하디(Robert A. Hardie. 1865-1949, 우리말 이름 하리영[河鯉泳])가 별세한 날입니다. 1949년 6월 30일, 은퇴 후 귀국한 의료선교사 하디는 안식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하디는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태어나 토론토 의과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토론토 의대 YMCA의 파송을 받아 1890년에 내한한 하디는 부산, 서울 등지에서 초기 사역을 수행했습니다 . 그는 1901년부터 원산과 강원도 통천 지방에서 3년 간 개척 선교 활동을 했지만, 뚜렷한 결실이 없어 절망감만 느낄 뿐이었습니다. 1903년 8월, 원산 지방 여선교사들이 성경공부와 기도를 위해 모인 자리에서 주강사로 선 하디는 영적 각성을 경험한 후 자신의 죄악을 공개적으로 회개했습니다. “나는 3년 동안 강원도에 교회가 처음 세워진 지경대 지역에서 어떤 다른 지역에서보다 애써 일하였으나, 그곳에서의 선교사역의 실패는 나에게 말할 수 없는 타격을 안겨 주었고, 사역을 더 할 수 없을 정도로 절망감을 가져다주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하디가 8월 처음에는 선교사들 앞에서, 그리고 주일 오전예배 때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 한국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교만, 심령의 강퍅함, 그리고 믿음의 부족” 등 자신의 죄악을 낱낱이 털어놓으며 눈물로 참회하고 회개했던 것이다. 하디의 말을 직접 빌린다면 “성령이 내게 오셨을 때 그의 첫 요구는 나의 선교사 생활의 대부분을 함께 보냈던 선교사들 앞에 나의 실패와 실패의 원인을 시인하게 하시는 것이었다. 그것은 고통스럽고 굴욕적인 경험이었다.”[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1』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4), 830-31.] 하디의 영적 체험은 원산부흥운동으로 이어졌고, 이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1906년 8월, 평양선교사들은 하디를 초청하였고, 어린 셔우드 홀은 하디의 메시지에 감동과 영적인 힘을 얻어, 조선선교를 위해 헌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위대한 변화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