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6년 8월 30일, 테오도리쿠스(Theodoric the Great, 454-526) 사망
8월 30일 “테오도리쿠스, 아리우스주의”
오늘은 테오도리쿠스(Theodoric the Great, 454-526)가 죽은 날입니다. 526년 8월 30일, 테오도리쿠스는 이질로 사망했습니다. 만찬석상에서 오도아케르를 살해하고, 동고트 왕국의 통치자로 등극한 테오도리쿠스는 나라를 번영과 평화로 이끌었습니다. 비록 그는 문맹이었고 성급한 성격의 사람이었지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 주었고, 로마인들을 로마의 법률대로 다스렸습니다.
테오도리쿠스는 일곱 살에서 열일곱 살에 이르는 소년시절을 콘스탄티노플에서 인질 생활로 보냈다. 그 뒤 그는 20여 년간 고트 족의 족장으로서 수많은 전투를 치렀으며, 그의 그런 역정은 라벤나를 오랫동안 봉쇄한 끝에 493년 이를 점령하고 오도아케르를 살해했을 때 절정에 이르렀다……그가 다스린 43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그의 왕국은 계속해서 평화를 누렸다. 농업은 번성했고, 이탈리아는 밀을 수입하는 처지에서 수출까지 할 수 있는 처지로 탈바꿈했다. 늪지가 개간되고, 항구가 건설되었으며, 사람들은 또 다시 원형경기장에서 벌이는 경기를 즐겼다. 테오도리쿠스는 깊은 학식을 지닌 보에티우스(Boetius)의 후원자가 되었고, 여러 세대에 걸쳐서 그리스 어로 번역된 그의 저서들은 고트 인들의 학문적 지식의 토대가 되었다.[Patrick Howard, Attila, King of the Huns: the man and the myth, 김훈 역, 『휸 족의 왕 아틸라』 (서울: 가람기획, 2002), 217-18.]
아리우스파 신자 테오도리쿠스는 그릇된 신앙으로 인해 힘겨운 말년을 보냈습니다. 아리우스주의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거짓 사상입니다. 니케아 신경(325)은 예수님이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본체와 다르다고 주장한 아리우스주의를 이렇게 정죄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 ‘그분이 나시기 전에는 계시지 않았다’, 또는 그분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서 생겨났다거나, 그가 다른 실체나 본질에서 유래되었다든지,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 창조되었고, 변할 수 있으며,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은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가 정죄한다.” 정교분리의 시대에 사는 우리는 테오도리쿠스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바른 교리와 성숙한 인격,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지닌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고 힘을 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테오도릭은 유대인들을 보호하였으며, 이들에 대한 적대 난동행위들을 엄벌에 처하였다. 그는 아리우스주의 교회들과 정통교회를 모두를 위한 공공사업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는 고트족과 로마인들 사이의 궁극적인 통합을 획일적인 통일이 아닌 종교자유의 토대에서 바라보았다. 테오도릭은 동로마 제국의 저스틴 황제(Justin)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양심을 통치할 수 있다고 가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권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518년……자기 의견과 다른 종교적인 생각에 관해서는 잔인하기 그지없는 박해자로 화하였다……저스틴의 즉위와 함께 아리우스주의는 동로마 제국 전체에서 가혹한 형벌을 받는 대상이 되었다. 서로마 제국의 영토 내의, 특히 테오도릭이 통치하던 이탈리아에서도 정통 신도들은 동로마 제국 황제에 동조하였다. 이에 따라 테오도릭은 자기 측근들 가운데서 아리우스주의가 아닌 자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William R. Cannon, History of Christianity of the Middle Ages, 서영일 역, 『중세교회사』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6), 20-21.]
오늘은 테오도리쿠스(Theodoric the Great, 454-526)가 죽은 날입니다. 526년 8월 30일, 테오도리쿠스는 이질로 사망했습니다. 만찬석상에서 오도아케르를 살해하고, 동고트 왕국의 통치자로 등극한 테오도리쿠스는 나라를 번영과 평화로 이끌었습니다. 비록 그는 문맹이었고 성급한 성격의 사람이었지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 주었고, 로마인들을 로마의 법률대로 다스렸습니다.
테오도리쿠스는 일곱 살에서 열일곱 살에 이르는 소년시절을 콘스탄티노플에서 인질 생활로 보냈다. 그 뒤 그는 20여 년간 고트 족의 족장으로서 수많은 전투를 치렀으며, 그의 그런 역정은 라벤나를 오랫동안 봉쇄한 끝에 493년 이를 점령하고 오도아케르를 살해했을 때 절정에 이르렀다……그가 다스린 43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그의 왕국은 계속해서 평화를 누렸다. 농업은 번성했고, 이탈리아는 밀을 수입하는 처지에서 수출까지 할 수 있는 처지로 탈바꿈했다. 늪지가 개간되고, 항구가 건설되었으며, 사람들은 또 다시 원형경기장에서 벌이는 경기를 즐겼다. 테오도리쿠스는 깊은 학식을 지닌 보에티우스(Boetius)의 후원자가 되었고, 여러 세대에 걸쳐서 그리스 어로 번역된 그의 저서들은 고트 인들의 학문적 지식의 토대가 되었다.[Patrick Howard, Attila, King of the Huns: the man and the myth, 김훈 역, 『휸 족의 왕 아틸라』 (서울: 가람기획, 2002), 217-18.]
아리우스파 신자 테오도리쿠스는 그릇된 신앙으로 인해 힘겨운 말년을 보냈습니다. 아리우스주의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거짓 사상입니다. 니케아 신경(325)은 예수님이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본체와 다르다고 주장한 아리우스주의를 이렇게 정죄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 ‘그분이 나시기 전에는 계시지 않았다’, 또는 그분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서 생겨났다거나, 그가 다른 실체나 본질에서 유래되었다든지,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 창조되었고, 변할 수 있으며,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은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가 정죄한다.” 정교분리의 시대에 사는 우리는 테오도리쿠스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바른 교리와 성숙한 인격,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지닌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고 힘을 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테오도릭은 유대인들을 보호하였으며, 이들에 대한 적대 난동행위들을 엄벌에 처하였다. 그는 아리우스주의 교회들과 정통교회를 모두를 위한 공공사업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는 고트족과 로마인들 사이의 궁극적인 통합을 획일적인 통일이 아닌 종교자유의 토대에서 바라보았다. 테오도릭은 동로마 제국의 저스틴 황제(Justin)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양심을 통치할 수 있다고 가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권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518년……자기 의견과 다른 종교적인 생각에 관해서는 잔인하기 그지없는 박해자로 화하였다……저스틴의 즉위와 함께 아리우스주의는 동로마 제국 전체에서 가혹한 형벌을 받는 대상이 되었다. 서로마 제국의 영토 내의, 특히 테오도릭이 통치하던 이탈리아에서도 정통 신도들은 동로마 제국 황제에 동조하였다. 이에 따라 테오도릭은 자기 측근들 가운데서 아리우스주의가 아닌 자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William R. Cannon, History of Christianity of the Middle Ages, 서영일 역, 『중세교회사』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6), 20-21.]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