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 존 오웬(John Owen; 1616-1683)
청교도와 함께 용서
양심은 본디 용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조금이라도 용서의 청을 받아들이는 것은 양심의 기대와 작용과 기능에 반하는 것입니다. 적에 대항하여 요새를 지키는 임무를 맡은 용감하고 충실한 사람을 가정해 봅시다. 어떤 사람을 시켜 요새를 지키는 충실한 사람에게 주인과 적이 평화를 맺었다고 말해, 자리를 떠나 문을 열고 경계를 풀게 해보십시오. 이런 거짓에 속지 않으려고 충실한 사람이 얼마나 주의를 기울이겠습니까? 충실한 사람은 말합니다. “아니, 상관에게서 분명한 명령이 있기 전까지 여기를 떠나지 않겠소.” 하나님의 권능은 장차 올 심판에 근거하여 모든 것을 순종 가운데 지키라는 임무를 죄인의 영혼에 있는 양심에게 주셨습니다. 화평의 소식을 다 믿어 그 임무를 저버리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죄책과 형벌은 떼놓을 수 없는 쌍둥이다. 범죄한 영혼을 하나님은 심판하신다. 용서라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나는 내 사명이 무엇인지 알며 그 일을 할 것이다. 상관, 즉 십자가의 원리를 끌어들이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 왕좌를 놓쳐 버리고 새로운 주인이 오게 될 것이니.”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모든 일이 어떻게 조합되었는지를 알지 못한 채 하는 말입니다. 아첨하지 않고, 놀래키려고도 하지 않고, 오직 필요한 때에 진리를 말하는 자기 양심을 믿지 않는다면 사람이 누구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양심을 매일 학대하지만 양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용서에 대해 말하고, 용서에 대해 설교하는 것을 듣도록 허용합니다. 하지만 용서의 능력을 받아들이는 것은 양심의 통치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입니다. “왕국에서 나는 당신보다 더 크다.”하고 양심은 말합니다. 많은 사람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 속에서 양심은 자기 지배력을 내놓지 않을 것입니다.
- 존 오웬(John Owen; 1616-1683)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