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칼빈, 『기독교 강요』2.8.47-50 [제9계명]이 계명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이 계명의 적용, [제10계명]이 계명의 전반적인 이해, 이 계명의 적용

아홉째 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출 20:16)


47. 일반적 해석


이 계명의 목적은,(진리이신) 하나님이 거짓말을 증오하시므로 우리는 서로 진실을 실행하여 속이지 말라는 것이다. 요약하면, 우리는 남을 중상하지 말며 거짓으로 남의 재산에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 간단히 말해, 함부로 거짓된 험담을 해서 남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금지에 연결된 명령은, 모든 사람의 명예와 소유에 손상이 없도록 보호하기 위해서, 진실한 말로 될 수 있는 대로 충실하게 남을 도우라는 것이다. 출애굽기 23장에 있는 주의 말씀은 이 계명의 뜻을 표명하시려고 한 것 같다.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출 23:1). 마찬가지로, "거짓 일을 멀리하며"(출 23:7). 다른 구절에서는 중상과 풍설을 퍼뜨리고 다닌다는 의미의 거짓말뿐 아니라(레 19:16), 형제를 속이는 것도 금하신다(레 19:11). 이 두 가지 일을 특별한 계명으로 금하신다. 바로 앞의 계명들에서 야비함과 음란과 탐욕을 금지하신 것과 같이, 여기서는 거짓을 금하시는 것이 확실하다. 방금 언급한 것과 같이,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악의와 악한 중상모략으로 이웃의 명예를 상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거짓말이나 심지어 훼방으로 남의 재물을 빼앗는 것이다. 엄숙한 법적 증언으로서 하거나, 사적인 대화중에서 하거나, 나쁘기는 마찬가지다. 언제나 문제의 귀착점은 같다. 여러 가지 가운데서 특히 추악한 죄 하나를 예로 들어, 나머지는 같은 종류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웃을 부당하게 해치는 중상과 훼방도 여기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으로 편리하다. 법정에서의 거짓 증언에는 항상 위서가 내포된다. 위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으로 셋째 계명에서 충분히 설명된다. 그러므로 이 계명을 올바로 지키려면, 진실을 말함으로써 이웃의 명예와 이익을 지켜 주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가 더욱 귀하다면(잠 22:1),명예 훼손은 재물 탈취보다 더 큰 상해가 된다. 그러나 재물을 약탈할 때에도 손으로 빼앗는 것에 못지않게 거짓 증언으로 횡령하는 때가 있다.


48. 우리 이웃의 명예


그러나 우리는 놀라리만큼 경솔하고 냉정하게 이 죄를 짓는 때가 많다. 이 질병이 현저하지 않은 사람은 극히 드물다. 우리는 남의 죄악을 들추어 폭로할 때에 독성 있는 쾌감을 즐긴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닌 때가 많다는 것으로 적절한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 형제의 명예가 거짓말로 손상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사람은, 진실이 용인하는 범위 내에서 형제의 명예에 오점이 찍히지 않기를 원한다. 참으로 그는 거짓말만을 상대로 형제의 명예를 지키지만, 거기는 그것을 지키도록 위탁을 받았다는 생각이 포함되었다. 이웃의 명예에 대해 하나님이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그것을 보호하도록 분발해야 한다. 따라서 험담이 전적으로 정죄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우리가 험담이라고 하는 것은 징계할 목적으로 하는 비난이 아니며, 악을 시정하기 위한 비난이나 공정한 비평이 아니다. 다른 죄인들에게 공포심을 일으키기 위한 공개적 징계도 아니며, 미리 경고해 두지 않으면 무지 때문에 위험 상태에 빠질 염려가 있는 사람들 앞에 사실을 알리는 것도 아니다. 험담은 미워서 하는 비난이며, 악한 의도로 거저 훼방하고 싶어서 하는 비난이다.


실제로, 이 교훈은 농담을 가장해서 정중한 체하면서도 가시가 있는 신랄한 조롱을 하는 것까지도 금지한다. 재담을 잘한다는 칭찬을 받고 싶은 자들이 이런 짓을 하는 예가 있다. 그들은 이런 건방진 짓으로 형제들을 상하게 하여 고통스런 수치와 슬픔을 준다. 그런데, 우리의 혀뿐 아니라 귀와 마음도 지배할 권리가 있는 입법자이신 하나님을 볼 때에, 우리는 험담을 듣고 싶어하는 것이나 불리한 비판을 너무 쉽게 표명하는 것도 다 같이 금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혀로 험담하는 병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이 심중의 악한 의도를 비난하시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랑한다면, 할 수 있는 대로 그리고 사랑이 요구하는 대로 혀나 귀가 험담과 악랄한 농담에 끌리지 않으며, 이유 없이 교활한 의혹에 마음이 끌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언행을 공정하게 해석하며, 우리의 판단과 귀와 혀로 그들의 명예를 신중하게 보호해야 한다.


열째 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출 20:17)


49. 이 계명의 뜻


이 계명의 목적은, 우리의 영혼 전체가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므로, 우리는 사랑과 반대되는 욕망을 모두 마음속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이웃의 손해를 초래할 만한 탐욕을 우리의 마음속에 일으키는 생각이 엄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 대응하는 것은 반대되는 교훈이다. 즉, 우리가 계획하며 숙고하며 결심하며 시도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이웃의 행복과 이익에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외관상 심히 복잡한 문제에 직면한다. "간음"과 "도둑질"이라는 말에는 간음하려는 욕망과 해치며 속이려는 의도가 포함된다고 이미 말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여기서 따로 다른 사람의 재산을 탐내지 말라는 금지를 받는 것은 불필요한 것같이 생각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의도와 탐심의 차이를 생각하면 문제는 곧 해결될 것이다.830) 앞에 있는 계명들에 관련해서 우리가 말한 의도는 마음이 정욕에 굴복한 때에 의지가 의식적으로 찬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의식적인 찬동이 없어도 탐욕이 있을 수 있다. 즉, 마음이 허망하고 패악한 것에 찔리거나 유혹을 받기만 할 때에도 탐욕이 있을 수 있다. 주께서는 앞에 있는 계명들에서 사랑의 원칙이 우리의 의지와 노력과 행동을 지배하도록 명령하셨다. 여기서는 같은 목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의 생각을 제어하라고 명령하신다. 즉, 우리의 마음을 반대 방향으로 몰아갈 수 있는 타락한 생각이나 비틀어진 생각이 전혀 생기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분노나 증오심이나 음란이나 강탈이나 거짓말 등으로 기울며 끌려드는 것을 금하신 것과 같이, 여기서는 거기에 다시 자극을 받는 것까지 금하신다.


50. 가장 깊숙한 의로움


하나님께서 이런 위대한 고결함을 요구하시는 데는 훌륭한 이유가 있다. 영혼이 전력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을 누가 옳지 않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어떤 영혼이 사랑이라는 목표에서 이탈해 버린다면, 그것에 병이 들었다는 것을 누가 인정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형제를 무시하고 자기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형제에게 해로운 욕망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올 것인가? 우리의 마음에 사랑이 완전히 배어 있다면, 이런 공상을 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탐욕이 있는 이상, 거기는 사랑이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항변하기를 탐욕은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며, 생각 속에 방향 없이 오락가락하다가 사라져 버리는 공상을 탐욕의 예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즉, 우리가 여기서 문제시하는 공상은 생각을 점령하는 동시에 탐욕으로 우리의 마음을 강렬히 욕심으로 자극하는 종류의 공상이다. 우리의 생각이 원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의 마음을 충분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놀라리만큼 열렬한 사랑이다. 한 점의 탐심도 방해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놀랍게 안정된 마음을 요구하시며, 사랑의 원칙에 어긋나는 자극은 바늘 끝만한 것이라도 허락하시지 않는다. 나의 견해에는 권위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이 계명을 이해하는 길을 나에게 처음으로 열어 준 사람은 어거스틴이었다.831)


모든 사악한 욕망을 전적으로 금지하는 것이 주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즐거운 듯한 거짓된 인상으로 우리를 가장 빈번히 매혹하는 것들을 그는 실례로 드신다. 이와 같이 우리의 욕망을 자극해서 광분 난무하게 만드는 것들을 빼앗음으로써 그 욕망 자체를 소멸시키시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율법의 둘째 판의 내용이며,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사람에게 다해야 할 의무를 풍부하게 가르친다. 하나님을 명상해야만 사랑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공격을 토대로 삼아서 가르치지 않는다면, 이 판에 있는 의무들을 가르치려고 해도 효과가 없을 것이다. 내가 돕지 않아도 현명한 독자는 일부 사람들이 고집으로 탐심에 관한 계명을 쪼개서 두 계명으로 만드는 것을832) 비판할 것이다. "탐내지 말지니라"는 말씀이 반복된 것은 우리 생각과 반대되지 않는다. 이웃의 "집"을 말씀한 다음에, 그 "집"의 내용을 "아내" 이하에 열거하신다. 이 점을 보아서, 이 계명은 히브리 사람들의 바른 예를 따라 우리도 한 계명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 아주 분명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남의 소유를 안전하게 지켜 침해를 받지 않게 하라고 명령하신다는 것도 분명하다. 손해를 입히거나 속여 빼앗고자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탐내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조차 금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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