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독서모임에 초대합니다. 매주 토요일 아침 7시 30분

 온라인 독서모임에 초대합니다. 내일, 2025년 8월 30일 토요일 아침 7시 30분입니다. 로이드 존스의 "설교와 설교자" 15장 '함정과 낭만(The pitfalls and the romance)'을 읽고 나누려 합니다. 온라인 독서 모임에 참여하실 분은 줌(zoom)을 이용해 주십시오. https://us06web.zoom.us/j/9023540308?pwd=JSdaM9nRsQWNcO978njV9UWJvTUIvy.1

회의 ID: 902 354 0308/암호: 111111

15. 함정과 낭만




아직도 언급해야 할 문제가 몇 가지 남아 있습니다. 그중 한 가지는 같은 설교를 반복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큰 문제는 아니지만, 설교자가 같은 설교를 또 한다는 데 놀라는 그리스도인들도 없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거의 죄라고까지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기에서 설교를 반복한다는 것은 똑같은 설교를 똑같은 교회에서 똑같은 사람들에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휴가 때나 특별한 절기에 다른 교회에 초청받았을 경우 자신의 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또 하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설교를 한 교회에서 반복한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저 보기가 부끄러워서라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 어떤 반주자는 자신이 반주자로 일하는 동안 '발람과 그의 당나귀'라는 그 교회 목사님의 유명한 설교를 일곱 번이나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부분은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암송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일에 대해서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미국의 한 유명한 설교자는 필라델피아에서 사역하는 내내 똑같은 설교를 해마다 반복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온 교인이 다 아는 사실로서, 그들은 그 설교를 다시 듣게 되기를 고대하곤 했습니다. 그것이 교인들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는 것은 저도 압니다. 사람들이 해마다 같은 설교를 해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설교자가 그렇게 반복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런 일에 찬성하기보다는 반대할 이유를 더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교회에서 같은 설교를 하는 일은 어떨까요? 그런 경우와 관련된 원칙이 있을까요? 책과 대화를 통해 알게 된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이 문제에 예외적인 입장을 취하는 유일한 인물은 찰스 헤든 스펄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제에 좀 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스펄전은 설교의 반복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매번 새로운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스코틀랜드를 처음 방문하여 에든버러에서 설교했을 때 일어난 일을 살펴보면 아주 흥미롭습니다. 그는 호기심으로 참석한 다수의 회중에게 설교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평소 하던 대로 새로운 설교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실패해서 아무 반응도 얻지 못하자, 급히 런던의 집에 연락하여 그 전주에 자신의 교회에서 설교한 원고를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스펄전도 어려운 위기의 순간에는 전에 했던 설교를 했습니다.

스펄전 외에 제가 아는 다른 위대한 설교자들은 대개 같은 설교를 반복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물론 윗필드도 그렇게 했고, 존 웨슬리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의 일기만 읽어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에 본문과 설교 제목을 기록해 놓았는데, 그것을 보면 같은 설교를 여러 곳에서 많이 반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에 저는 재출간된 벤자민 프랭클린 Benjamin Franklin의 일기에서 흥미로운 내용을 읽었습니다. 그는 윗필드가 새로운 설교를 할 때는 늘 알아맞힐 수 있노라고 장담했습니다. 설교만 듣고 설교하는 모습만 관찰해도 그것이 새 설교인지 여러 번 반복해서 익숙해진 설교인지 즉석에서 알아맞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새 설교를 할 때에는 익숙한 설교를 할 때처럼 편하고 자유로운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특히 윗필드는 원고 없이 즉석에서 설교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좀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1921년에 죽은 어느 위대한 웨일스 설교자는 적어도 스무 번 이상 설교하기 전까지는 제대로 설교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말을 아주 공공연히 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고 편하게 듣고 넘길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에게는 수사적 연설가 내지는 극적인 낭송자의 경향이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어느 위대한 노설교자가 같은 설교를 세번째 듣는다며 불평하는 사람에게 아주 훌륭하게 대답한 말이 생각납니다. 그 세 번의 설교는 한 장소에서 한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장소에서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불평한 사람은 설교자가 어디를 가든지 따라다니는 사람으로서 가히 성가신 존재라 할 만했습니다! 이 사람이 불평을 터뜨리자 재치 있는 노설교자가 반문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설교 말씀대로 실천했습니까?"

그는 머뭇거리며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설교자가 다시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실천할 때까지 계속 설교하겠습니다"



같은 설교를 반복해도 되는 경우

어느 정도까지는 만족스러운 대답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관행의 정당성을 참으로 입증해 주는 더 나은 대답이 있을까요? 저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관행을 옹호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설교는 한 가지 진리 내지는 여러 가지 진리를 진술하면 되는 일이 아닙니다. 설교는 그 이상입니다. 만약 강해만 하면되는 일이라면, 그런 내용을 반복하는 일에 기꺼이 반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란 전하지 않으려야 전하지 않을 수 없는 메시지요 그 자체로 완결성이 있으며 특정한 형식과 모양을 갖춘 총체라는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같은 설교를 다른 곳에서 반복하는 일도 찬성할 이유가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주된 이유는 어떤 메시지가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주어지는 경우를 모든 설교자가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는 이미 한 적이 있습니다. 평상시와 달리 좀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설교가 있습니다. 마치 대지의 순서까지 제시해 주는 것 같고 하나님께서 직접 그 모든 선물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성령께서 누군가를 회심시키기 위해, 또는 다른 이들을 특별히 축복하시기 위해 이 메시지를 높이시고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아마도 모든 설교자가 그 경험을 증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그런 특별한 설교를 반복해서는 안 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설교자는 항상 자기가 가진 최선의 것, 바로 그 최선의 것을 주고 싶어 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최선의 설교를 택해서 전하는 것은 지극히 합당한 일입니다.

더 구체적인 논거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제가 옹호하는 설교관을 받아들인다면, 실제로 설교하는 가운데 내용이 더 깊어지고 발전한다는 사실 또한 인정할 것입니다. 서재에서 준비할 때 모든 내용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설교하는 가운데 더 깊은 부분들을 보게 되고, 그 결과 설교 내용이 더 깊어지고 발전하게 됩니다. 이것은 아주 재미있고도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이 또한 제 경험과 제가 아는 다른 이들의 경험을 토대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전에 어떤 설교자가 놀란 일에 대해 들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는 다른 설교자를 깊이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본인도 좋은 설교자였지만 자신이 흠모하는 설교자만큼 뛰어나거나 인기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량하고 겸손한 사람으로서 그 설교자를 신실하게 추종했습니다. 한번은 그가 총회에 참석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설교를 듣는 것이 그 총회의 관례였습니다. 그 시간에는 항상 뛰어난 설교자들이 초청되곤 했는데, 그때 마침 제 친구가 흠모하는 설교자가 초청되었습니다. 제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목사님이 본문을 읽는데 바로 실망이 되더라고. 석 달 전에 우리 교회에 특별집회가 있었을 때 바로 그 본문으로 설교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에 정말 마음이 불편하고 괴로웠지. 그때 설교는 그 목사님의 평소 실력에 못 미치는 거이었거든. 그런데 총회 같은 큰 모임에서 그런 설교를 했다가 평판에 해라도 입을까 봐 걱정이 되고 낙심이 되었다네"

그는 연이어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었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설교가 깊어지고 발전되었더군. 뼈대는 그대로였네. 정말 훌륭한 설교로 변해 버렸다네. 그는 큰 능력으로 말씀을 전했지. 그 노설교자의 특별한 점은 설교가 계속 성장한다는 거야. 아주 놀랍게 발전하지"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설교와 비교했습니다.

"그런데 내 설교에는 아무 변화가 없어"

그는 아주 꼼꼼하고 신중하게 한 글자 한 글자 다 기록하며 준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설교가 성장할 수가 없었습니다. 반면에, 그가 흠모하는 설교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설교가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는 똑같은 내용을 가지고 설교했음에도 다른 많은 의미에서는 같은 설교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의 설교는 전보더 더 훌륭하고 풍성하며 탁월해졌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설교 내용과 전달의 관계라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미 고백했듯이 그 차이를 규명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설교 내용에 익숙해질수록 더 효과적으로 잘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은 경험적인 진리입니다. 아무래도 긴장이 덜 되고, 할 말을 기억해 내기 위해 집중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맨 처음 설교할 때와 달리 모든 내용을 잘 알고 있는 탓에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점을 고려할 때, 여러분 자신에게 무언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설교, 그 속에 참된 메시지가 들어있다고 생각되는 설교,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 축복하셨다는 생각이 드는 설교를 반복하는 것은 지극히 합당한 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청중에게도 유익한 일입니다.


몇 가지 경고

여기에서 "한 설교를 몇 번까지 반복해도 될까요?"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도 꽤 어려운 문제입니다. 탁월하고 유명했던 저의 진임자 켐벨 모건 박사는 이 문제에 아무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한 번은 다음과 같은 설교를 시작한 적도 있었습니다.

"고백은 영혼에 유익하다고 하지요. 그러니 설교를 히작하기 전에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늘 오전 설교는 제가 119번째하는 설교입니다"

똑같은 설교를 몇 번까지 해도 될까요? 이에 대해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단순한 수치나 통계의 문제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켐벨 모건 박사는 설교 원고를 넣어 두는 봉투에 어디에서 몇 번째 설교했는지 아주 세심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것은 좋은 습관입니다. 그러나 횟수에 대해서는 기계적으로 몇 번까지 허용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볼 때 법칙은 한 가지뿐입니다. 그 설교가 더 이상 여러분을 사로잡거나 감동시키지 않는다면, 여러분에게 더 이상 은혜의 통로가 되지 않는다면 그만 하십시오. 그럴 경우에는 그만 하십시오. 그럴 때 멈추지 않으면 기계적으로 설교하게 되고, 심지어 '공연'을 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해로운 일은 없습니다.

미국에서 열린 대규모 성경 수련회에 갔을 때 많은 이들의 요청으로 같은 설교를 반복했던 사람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A'에서 'Z'에 이르기까지 알파벳 첫 글자를 따서 주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굉장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길이도 상당히 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그 설교를 들으면서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거나 감사하는 마음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신성모독에 가까운 공연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는 급하게 설교했습니다. 시간 내에 마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설교를 마치자마자 떠나야 했기 때문에 말을 아주 빨리 했습니다.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진리가 기계적으로 밀려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전에도 여러 차례 그 설교를 들었는데, 그들은 그 설교를 훌륭하게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확실히 솜씨 좋게 만들어진 일종의 이합체시(각 행의 첫 글자를 짜 맞추면 하나의 말이되는 유회시)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주님을 사모하며 예배하게 만들기보다는 설교자의 기억력과 영리함에 감탄하게 만드는 천박한 공연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공연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아무리 강력하게 비난해도 지나치지 않은 잘못입니다.

한 가지 더 경고하겠습니다. 이처럼 같은 설교를 반복할 경우에 꼭 피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영국뿐 아니라 미국에도 아주 잘 알려진 설교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는 원고를 세심하게 준비해서 완벽하게 기록했고 설교할 때에도 대개는 아주 신중한 태도로 그 원고를 읽었습니다. 그는 특히 단어와 의미의 미묘한 차이에 유의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지역을 순회하며 물건을 판매하는 한 판매원이 그가 목회하는 도시에 가게 되었습니다. 주일 오전예배에 참석해서 그의 유명한 설교를 들은 판매원은 자기 평생에 최고의 설교를 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설교 중간쯤에 설교자가 보여준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위대한 설교자는 마치 연극을 하듯이 말을 멈추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무슨 단어를 써야 할까요?"

그는 한 단어를 언급하며 말했습니다. "아니, 비슷하지만 꼭 들어맞지는 않는군요"

그는 또 다른 단어를 끄집어냈습니다. "이것도 정확치 않습니다"

그러다가 아주 극적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 바로 이겁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단어가 여기있었군요"

그 판매원은 참으로 굉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설교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음 주말에 그 지역의 다른 도시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토요일 석간신문에 다음 날 설교할 사람의 이름이 실린 것을 보고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그 위대한 설교자가 한 교회의 기념예배에 온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음 날 어느 교회로 갈 것인지는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 사람이 온다는 교회로 갔습니다. 그런데 설교 시간이 되어 본문을 읽는데, 바로 전주에 들은 본문이었습니다. 약간 움찔했지만 다시 한 번들을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설교 중반쯤에 또 연극하듯이 말을 멈추더니 "여기 무슨 단어를 써야 할까요?"로 시작되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찌나 정이 떨어지는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는 그 사람의 설교를 듣지 않겠다고 하면서 밖으로 나와 버렸습니다.

같은 설교를 하더라도 이런 짓은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설교에 너무나 큰 해를 끼치는 것이며 정직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그 설교자는 질문을 던질 때 이미 그 단어를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갑자기 떠오른 듯한 인상을 주려 했습니다.

제가 알고 지냈던 한 노설교자를 생각하면 참 연민이 느껴집니다. 그는 한 지역 교회에서 수년 동안 성실하게 목회한 선량한 분으로서, 그리 뛰어난 설교자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지긋해졌을 무렵, 계절마다 모이는 협회에서 설교 초청을 받는 큰 영예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많은 설교자들이 열망하는 목표로서 설교자 최고의 영예가 분명했습니다. 그 최고의 영예가 마침내 그 노목사님에게도 찾아온 것입니다. 그 모임에서는 두 명의 설교자를 초청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목사님은 그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두 명의 설교자가 함께 강단에 올랐습니다. 그 노목사님이 찬송을 부르면서 의자에 앉은 회중을 한 사람씩 주의 깊게 살펴보는 모습을 본 다른 설교자가 살짝 물었습니다.

"뭘 하고 계십니까? 오늘 할 설교를 전에 들은 사람이라도 있나 살펴보시는 중입니까?"

"아니, 이 설교를 아직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이 있나 살펴보는 중이라오" 같은 설교를 전에 들은 사람의 숫자가 그 정도로 많다면 그 설교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에 어느 유명한 설교자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가 본문을 읽자, 제 옆에 앉아 있던 목사님이 슬쩍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습니다.

"오늘 밤에는 딴 생각을 안 할 수가 없겠네요"

제가 "그렇군요"라고 대답하자 그가 물었습니다.

"목사님도 들은 적이 있는설교지요?"

"네, 저 목사님이 전에 목회하던 교회에서 세 번 들었지요. 또 저분이 편집자로 있던 신문에 실린 것도 여러 차례 읽었습니다"

실제로 그 자리에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은-그것은 천국 각지의 목회자와 집사들로 이루어진 모임이었으므로- 그 설교를 한 번 이상은 읽었거나 들은 이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왜 이런 일을 하는 것일까요? 한번 공정하게 생각해봅시다. 오늘날 자신도 같은 문제에 빠져 있는 것을 보지 않으려면, 그리하여 예전에 남을 향했던 비난의 화살이 자신을 향하게 하지 않으려면 그런 사람들을 너무 성급하고 쉽게 정죄해 버려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중에 한 가지는 당연히 게으름입니다. 그것은 병명거리나 논쟁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때로는 돌연한 공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앞서 말한 사람도 일종의 공포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예배가 끝날 무렵, 그는 우리 중 몇 사람에게 그 큰 모임을 위해 특별한 설교를 준비했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주말에 몸 상태가 그리 좋지 못했고, 그런 상태로 강단에 서자 새로 준비한 설교를 제대로 전할 자신감을 잃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공포에 사로잡히면서, 예전에 잘했던 설교를 다시 하기로 결정해 버렸습니다. 불행히도 그는 그런 일을 매우 자주 했습니다. 물론 자만심의 요소도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진리를 전달하는 일보다 설교자로서 자신의 평판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미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자만심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설교를 반복할 경우에는 반드시 기록을 남겨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같은 문제에 빠질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한 사람은 이런 기록을 해 두지 않았는데, 그의 이야기를 한 가지만 더 하고 이 부분에 대한 고찰을 마치고자 합니다. 어느 날, 저는 지방의 한 대도시에 있는 큰 교회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제가 말한 그 설교자에 대해 말하던 중에 그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몇 년 전 어느 기념예배 때 그목사님을 모신 적이 있습니다. 그는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라는 본문으로 설교했지요. 우리 모두 그동안 들은 설교 중에 최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해 기념예배에 누구를 초청할지 의논할 때 재론의 여지 없이 만장일치로 그 목사님을 다시 모시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편지를 보냈고 그는 초청을 받아들여 그해에도 우리 교회에 와 주었습니다. 당일에 설교하기 위해 강단에 선 목사님이 본문을 읽었습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좀 실망은 되었지만 그래도 설교는 여전히 좋았고 우리 모두 기쁜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그 다음 해에 다시 기념예배 설교자를 결정할 때에는 상당한 이견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을 다시 모시자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전에 있었던 일을 들어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많은 토론 끝에 어쨌든 그 목사님께 다시 기회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누구나 가끔은 실수하는 만큼, 한 번 잘못했다고 해서 바로 내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 해에도 오게 된 그 목사님이 본문을 읽었습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그때는 그야말로 '인내'의 한계에 부닥쳤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후로 다시는 그 목사님을 초청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배울 교훈은 한 가지입니다. 기록을 남기십시오.


설교의 성격을 파악하라

제가 아주 흥미롭게 생각하는 주제인 설교의 성격에 대해 살펴봅시다. 제가 말하고 싶은 점은 설교마다 각각의 성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수수께끼 같은 문제입니다. 분명히 여러분이 원고를 준비해서 작성했는데도, 그 설교 자체가 독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최근에 한 소설가와 오랜 시간에 걸쳐 재미있는 대화를 나누면서, 그 소설가 역시 자기 소설의 등장인물들에 대해 똑같은 생각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흥미를 느낀 적이 있습니다. 그는 "그 인물들 때문에 골치가 아파요"라고 말했습니다. 그중에 어떤 인물은 그가 원하는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인물이 작가를 조종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작가가 인물들을 만들어 냈음에도, 그 나름대로 성격과 개성과 인성에 있어서 작가의 통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가를 통제하려 든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일이 설교에도 일어납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아주 분명한 사실입니다. 실제로 어떤 설교는 스스로 자신을 전달하기 때문에 설교자가 할 일이 거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설교자의 개입을 허용치 않고 그 설교 스스로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은 일부 설교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그 차이를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나머지 설교들은 아주 세심하게 조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설교가 설교자를 거의 초주검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저도 서론에서부터 진을 빼게 만드는 설교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그 설교가 저를 조정하여 제 손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내용을 숙지하고 이해하느라고 많은 시간을 투자하곤 합니다. 실제로 서론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앗겨 정작 중요한 부분이나 특히 절정 부분에 이르러서는 이미 지치고 피곤해진 나머지 주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설교마다 아주 명확한 성격이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을 잘 숙지해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점은 아주 중요합니다. 설교를 항상 말에 비유하곤 했던 한 노설교가-제가 아주 젊었던 때였는데 그분은 거의 인생의 황혼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가 생각납니다. 그는 시골 사람으로서 젊은 시절에 말을 자주 탔던 탓에 설교 내용과 전달에 대해 말할 때마다 말 타는 일에 빗대어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한번은 그가 설교를 망친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오래된 설교가 나를 내동댕이쳐 버렸군. 그럴 줄 알았어. 아주 땅바닥에 팽개쳐 버렸네"

설교가 말처럼 그를 '내동댕이쳤다'는 것입니다. 여기 핵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교할 내용을 잘 숙지해 놓을 것을 권합니다. 그러면 그때그때 상황에 적합한 설교가 무엇인지, 자신의 몸 상태에 적합한 설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설교에는 이 모든 요소가 개입되는데, 그 하나하나가 다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굉장히 영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는 아직 육체라는 "질그릇"에 보배를 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좀 더 효과적으로 만들 수 있는 요소라면 무엇이든지 무시하지 말고 고려하십시오.


표절의 위험

그 다음은 말하기 껄끄러운 문제로서, 남의 설교를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심심찮게 일어난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언급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이에 대해 할 말은 한 가지뿐입니다. 남의 설교를 사용하면서도 그 사실을 맑히지 않는 것은 아주 부정직한 것입니다. 본인도 자존심이 있을 텐데 어떻게 남의 설교를 몰래 사용하는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듣는 사람들은 그 설교를 칭송하며 감사히 여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본인만큼은 그것이 자기 설교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도적이요 강도입니다. 그것은 큰 죄입니다. 이미 말했듯이 그러고서도 자존심을 유지한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여기에는 재미있으면서도 좀 엉뚱한 측면도 있습니다. 스펄전과 한 신학교 학생 사이에 벌어진 유명한 이야기가 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학생은 꾸지람을 듣기 위해 학장 앞에 불려와 있었습니다. 그는 주일마다 여러 교회에서 설교했는데, 그에 대한 소문들이 학교로 들려왔습니다. 설교가 아주 좋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스펄전의 설교를 계속 베끼고 있다는 비난도 들렸습니다. 학장은 이 문제를 처리할 책임이 있었기 때문에 젊은이를 불러서 물었습니다.

"자네가 여기저기 다니면서 스펄전 목사님의 설교를 한다는 말을 들었네. 사실인가?" 그러자 젊은이가 대답했습니다.

"아니, 사실이 아닙니다"

학장이 계속 추궁했지만 그는 한사코 부인했습니다. 한동안 실랑이를 벌인 끝에 학장은 젊은이를 스펄전에게 데려가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스펄전을 찾아가 그 문제를 털어놓았습니다. 그러자 스펄전이 말했습니다.

"자, 겁낼 필요 없네. 자네가 정직하게만 말한다면 처벌하지 않을 테니까, 우리 모두 죄인이 아닌가? 하지만 사실은 밝혀야지. 자네는 이러이러한 본문을 설교했는가?"

"네, 목사님"

"주제는 이러이러하게 나누었고?"

"네, 목사님"

"그런데도 내 설교를 베낀 것은 아니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목사님"

한동안 질문을 던지던 스펄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어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럼 이게 자네 설교란 말인가?"

"오, 아닙니다"

"그럼 누구 설교인가?"

"윌리엄 제이 William Jay of Bath의 설교입니다"

제이는 19세기 초 바스에서 사역한 유명한 설교자로서, 두 권의 설교집이 출판되어 있었습니다. 스펄전은 "잠깐 기다리게"라고 말하고는 서재에서 그 두 권 중에 한 권을 뽑아 왔습니다. 그 책에 문제의 설교가 실려있었습니다. 본문과 대지를 비롯한 모든 내용이 똑같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된 일일까요? 사실은 스펄전도 윌리엄 제이의 설교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는 제이의 설교를 자신의 다른 설교들과 함께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수년 전에 제이의 설교집 두 권을 읽었는데, 그 후에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는 것 외에는 다른 설명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스펄전은 자신도 모르게 제이의 설교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시인했습니다. 그 설교가 무의식중에 그의 기억 속에 들어와 있었음을 시인한 것입니다. 그 신학생은 스펄전의 설교를 베꼈다는 비난은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의 것을 훔친 죄는 여전히 벗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좋은 예가 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설교자나 절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 특히 평신도 설교자들에게 위안이 될까 해서 다시 한 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 또한 스펄전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그도 문득문득 침체에 빠질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통풍을 앓고 있었는데, 통증이 심해질 때면 영적인 침체도 같이 따라왔습니다. 한번은 그렇게 침체에 빠진 나머지 도저히 설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스스로 설교할 자격조차 없다는 자괴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주일에 자신의 교회인 태버내클 교회에서 설교하지 않고 에섹스의 고향 집으로 내려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주일 아침이 되자 어린 시절에 다녔던 작은 예배당 뒷자리에 슬며시 들어가 앉았습니다. 그날은 한 평신도 설교자가 강단에 섰는데, 가련하게도 그날 설교가 마침 스펄전의 것이었습니다. 그 선량한 사람이 설교를 마친 순간, 스펄전이 달려나가 눈물을 흘리며 감사를 표하자 그 불쌍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 목사님을 뵐 면목이 없군요. 제가 방금 한 설교는 바로 목사님의 설교였습니다"

"누구 설교였든 상관없습니다. 나는 오늘 그 설교를 통해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과 내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 내가 목회자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설교할 수 있습니다"

평신도 설교자의 입술에서 나온 그 자신의 설교가 이런 역사를 일으킨 것입니다. 남의 설교를 사용해도 좋은 경우는 오직 이런 경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합니다. 1937년 친애하는 노성도이자 전도자인 멜 트로티 Mel Trotter of Grand Rapids와 함께대서양을 건넌 적이 있습니다. 그는 죄로 가득 찬 부끄러운 삶을 살다가 영광스럽게 회심하여 큰 구호 선교 단체의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다음의 재미난 이야기는 그가 직접 저에게 해 준 것입니다. 어느 주간에 그는 강연도 하고 일도 체계적으로 정비하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상담하면서 아주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는 학구적인 사람이 아니었던 데다가 너무 바빴기 때문에 주일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주일 저녁예배 설교는 어찌어찌 준비했지만 오전 예배 설교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토요일 밤까지도 설교가 준비되지 못해 불편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도저히 대책이 서지 않았습니다. 결국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친구인 켐벨 모건 박사의 설교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강단에 올라 늘하던 대로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면서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설교 전에 부르는 찬송을 막 끝내려는 찰나, 예베실 뒷문이 열리더니 켐벨 모건 박사가 들어와 뒷자리에 앉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본 그는 너무나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작정했던 대로 모건의 설교를 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모건이 다가와 설교에 따듯한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러자 멜 트로터가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자네 아이에게 내 옷을 입혔다고 해서 못 알아보았을리가 있나?"

1936년 8월 둘째 주일에 우리 가족은 서 웨일스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성공회밖에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머물던 집의 농부 부부와 함께 그 교회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교구 신부가 강단에 올라 본문을 읽자 아내가 옆구리를 쿡 찔렀습니다. 그것은 1935년 마지막 주일, 제가 처음으로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전한 본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런던 강단에 처음으로 서는 설교자였기 때문에 두 세 종류의 일간지나 잡지에 내용이 실렸던 모양입니다. 아내는 그것을 읽었기 때문에 내용을 휜히 알고 있었습니다. 신부는 본문을 읽고 설교를 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저는 남이 제 설교를 하는 것을 듣고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그는 저를 몰랐고 전에도 저와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 다음 주간 내내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 하루는 주인집 농부가 일부러 그를 데려와 우리에게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가 제 설교 내용을 다룬 방식은 그리 인상적이지 못했지만, 그 상황에 대처한 방식만큼은 만점을 줄 만합니다! 그는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목사님 이야기는 자주 들었습니다. 여기 오신 줄 알았으면 예배 때 일과(성공회에서 아침저녁으로 읽는 성경 본문)를 읽어 주십사고 청했을 텐데요"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저는 그의 비밀을 폭로하지 않았습니다. 남의 설교를 사용하면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위험에 대한 이야기를 제 아내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내가 다니던 교회에 두 주 연속으로 두 명이 다른 설교자가 와서 설교했는데, 둘 다 똑같은 설교를 했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 중 누가 원래 주인이었을까요? 가장 그럴 법한 대답은 둘 다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 다 남의 설교를 빌렸든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훔쳤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짓은 이런 식으로 적발되게 되어 있습니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본문만 바꾸는 것으로는 감출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본문을 바꾸어도 분별력 있는 청중은 알아보게 마련입니다.

한두 가지 예증이나 예화를 덧붙인다고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아는 한 사람은 주일이 오기 전 며칠 동안 서너 번에 걸쳐 스펄전의 설교를 읽은 후에 설교하는 것이 자신의 설교 준비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아시겠지만 사실 스펄전의 설교를 그대로 하는 건 아니예요. 그냥 죽 훑어보면서 참고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런 식으로 죄를 합리화하려 들지만, 그럴수록 본심만 드러날 뿐입니다.

이에 대해 몇 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남의 설교를 사용하더라도, 즉 회중을 고려할 때 그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어서 할 수 없이 남의 설교를 사용하더라도, 제가 한때 남 웨일스에서 알고 지내던 불쌍한 설교자처럼 하지는 마십시오. 문자 그대로 진실을 밝히건대, 그는 한 번도 웨일스를 벗어난 적이 없는 사람이었고 다른 곳은 물론이요 잉글랜드조차 가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 본문을 읽더니 이런 말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제가 워밍 계곡 정상에 섰을 때...!"

다시 말해서 남의 설교를 쓰더라도 버릴 것은 버리고 쓸 것만 쓰라는 것입니다. 제 설교로 설교한 그 신부도 첫 문장만큼은 베끼지 않는 작은 재치조차 부릴 줄 몰라서, 원래 원고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워낙 인상이 깊이 박힌 탓에 아직도 그 문장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교회 친교 모임에서 토론하기에 아주 좋은 주제는 ..."

그 교회에는 친교 모임이 없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친교 모임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런 말로 설교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남의 설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이런 일은 피하십시오. 그리고 좀 더 정직해지고 싶다면 남의 설교에 신세를 졌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밝히십시오.


이것이 설교의 낭만이다

설교의 낭만이라는 훨씬 중요한 문제로 빨리 넘어가도록 합시다! 설교의 낭만만큼 멋진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자 떨리는 일이고, 흥분되는 일이며, 보람있는 일이고, 놀라운 일입니다. 주일 오전이나 저녁에 새 설교를 들고 강단으로 걸어 올라갈 때의 느낌, 특히 그 메시지가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알기에 한시라도 빨리 전하고 싶다는 갈망으로 강단에 설 때의 느낌에 비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경험입니다. 설교 내용이 최고로 좋다 하더라도 다른 곳에서 되풀이할 때는 처음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제가 한곳에서 정규적으로 오래 목회할 것을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저도 은퇴 이후에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이 경험에 비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론 다른 곳에서 설교할 때에도 아주 좋은 시간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회중의 관계, 여러분의 준비와 다른 많은 요인들에서 비롯되는 이 특별한 경험은 오직 한 교회에서 정규적인 사역을 할 때에만 맛볼 수 있습니다.

예배의 무한한 가능성은 이 낭만의 또 다른 측면을 이루고 있습니다. 또는 예배의 불확실성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그 불확실성에도 영광스러운 무언가가 들어 있습니다. 진정한 설교자는 자신이 강단에 선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강사는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설교자는 예기치 못한 경험을 합니다. 자신 있게 준비해서 좋은 예배를 드릴 것 같다는 좋은 느낌으로 강단에 섰는데 실제로는 형편없는 예배를 드릴 때도 있습니다. 그 또한 놀라운 경험입니다. 어찌 되었든 여러분이 예배를 통제하는 유일한 사람이 아님을 보여 주는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자신이 예배를 통제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을 통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 자신도 '하나님 아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게 됩니다.

역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긴강도 되고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제대로 준비하지도 못했다는 불편한 마음으로 강단에 섰는데 갑자기 모든 상황이 잘 풀릴 뿐 아니라 몸 상태까지 좋알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설교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아주 두드러진 것입니다. 윌필드의 일기를 읽어보면 그가 이 점을 자주 언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건강이 좋지 못했던 그는-심장 문제 때문이었음을 알 수도 있고 말년의 과도한 비만 증세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일기나 편지에 "설교하면서 땀을 흠뻑 쏟기 전까지는 건강이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식의 말을 쓰곤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땀을 쏟으며 설교를 하고 나면 건강이 회복되었습니다. 저도 "내가 해 본 유일한 터키욕은 강단에서 한 것이 전부"라는 말을 자주 하곤합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납니다. 설교하는 가운데 기운을 차리고 건강을 회복하며 힘을 되찾아서 본인도 자신을 거의 알아보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직 설교자만 약하고 지친 모습으로 강단에 섰다가 설교를 마치고 내려올 때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예외상황이 있는데, 그 역시 제가 목회하는 내내 아주 흥미롭게 여겼던 부분입니다. 저는 주일에 일어날 일을 토요일에 미리 알 수 있었던 적이 가끔 있었습니다. 제가 '가끔'이라고 말한 데 주의하십시오. 그것은 확실히 일상적인 경험은 아니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중에 말씀에 사로잡히며 감동을 받을 때, 대개는 주일 설교 시간에도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강조하건대 원고를 잘 작성했을 때가 아니라 사로잡히고 감동받았을 때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의 마음이 움직일 때, 여러분이 준비하는 메시지가 능력 있게 다가와 역사할 때, 회중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저는 서재에서 저 자신이 말씀에 사로잡히며 감동받을 때 주일에도 같은 일이 일어나리라 짐작할 수 있었고, 대개는 그 짐작이 들어맞았습니다.

설교하다가 주제가 더 발전되는 일에 대해 앞서 말한 적이 있는데, 설교의 낭만이라는 측면에서 다시 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이 또한 설교자를 경이감으로 충만케 만드는 지극히 놀랍고 떨리는 경험입니다. 이것은 흔히 찾아오는 경험이 아니며 사람이 어찌할 수 있는 경험도 아닙니다. 이 일은 그냥 일어납니다. 설교를 준비해서 강단에 섰는데, 설교하던 중에 첫 번째 대지가 발전하여 한 편의 설교가 되어 버리는 경험을 저도 종종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연속 설교 내용을 얻어서 강단을 내려온 적이 많았습니다. 첫 번째 대지가 한 편의 설교로 완성되었으니, 그 다음 대지들로도 각각 한편씩의 설교를 완성하면 연속 설교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서재에서 설교를 준비할 때가 아니라 실제로 설교하던 중에 일어났습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에는 연속 설교가 가능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설교하다가 갑자기 눈이 열려 그 가능성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이야말로 진정한 낭만이 아닐까요? 이런 일만 일어난다면 설교 거리가 없어서 필사적으로 남의 설교를 찾는 처지는 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다음 주일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고대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제 경험에서 나온 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 자리에서 밝히는 것입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고 상상해 본 적도 없는 내용이 실제로 강단에서 설교하는 중에 생각날 때, 설교자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와 놀라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런 일은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런 경험을 이루고 있는 또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저는 미리 준비한 설교를 전부 전해서는 안 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면 그 설교를 수정하여 손질함으로써 원래의 연속 설교 계획을 재조정하곤 했습니다. 또 가끔은 준비한 설교의 절반만 전하고 강단에서 내려오기도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한 경우가 생각나는데, 그날은 왜 그래야만 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여하튼 그날 절반만 설교하고 내려왔기 때문에, 그 다음 주일 설교는 자연히 준비한 샘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다음 주일이 왔고 저는 원래 원고의 나머지 부분을 한편으로 완성해서 전했는데,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자유가 느껴졌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한 사람이 찾아와 저를 만나고 싶어하는 방문객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로는 목회자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 찾아온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찌나 감동을 받았던지 거의 말도 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무엇 때문에 그토록 깊은 감동을 받은 것일까요? 그는 하나님께서 바로 이 설교를 들려주시려고 그토록 먼 데서부터 여기까지 자신을 데려오셨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믿음의 시련]이라는 작은 책의 서문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여기에서 반복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다시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의 확신이 옳다고 믿습니다. 그 일은 저도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만약 그 전주에 준비한 설교를 전부 전해 버렸다면 이 사람은 그날의 설교를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전주에 마음에 부담을 느껴서 절반밖에 설교하지 못한 채 나머지 절반을 남겨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말했듯이 그 당시에는 좀 혼동이 되었지만, 그날 그 목사님을 만나면서 모든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상황을 통제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서 낭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전혀 모를 수 있습니다. 저도 전에는 그 목사님에 대해 들어 본 적도 없었고 아는 바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날 아침에는 오직 그 목사님만을 위해 준비된 설교를 했습니다. 제가 원래 계획했던 대로 설교했다면 그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에 비할 만한 경험도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낭만을 세상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오직 설교자만 맛볼 수 있는 경험입니다. 이런 경험을 많이 하면 할수록 여러분은 놀라움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며 자신을 이 영광스러운 사역으로 불러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현실적인 차원의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설교할 때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럴 때에는 재빨리 생각을 해서 설교하는 동안 내용을 잘 전개시켜 마무리를 지어야 합니다. 즉, 한 편의 완결된 설교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배열도 일정한 방식으로 조정해야 하고 내용도 덧붙이거나 부연해 가면서 결론과 절정으로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그런 경우에도 미완성으로 끝내지 말고 그 나름대로의 논리적인 결말과 결론 및 적용을 제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설교자가 자유롭게 설교해야 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 능력은 경험을 통해 자라납니다.

설교의 낭만에 속하는 또 다른 요소는 누가 여러분의 설교를 들을지 모르며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또한 모른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는 그 설교가 삶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이 그리 드물지 않다는 데 감사를 드리십시오. "비웃으려고 찾아온 어리석은 자들이 남아서 기도하네" 완전한 절망 속에 예배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회심하고 중생한 새사람이 되어 기쁨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의 삶 전체가 변화되는 일에 여러분이 관여하며 일익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할 일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일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경험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한 영혼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영원한 문제들이 다루어지며 영원한 운명이 결정됩니다.

또 흔히 하게 되는 경험은 예배가 끝난 후 사람들이 찾아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 놀랍네요. 설사 목사님이 저와 제 상황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해도 이보더 더 직접적인 말씀은 해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어떤 문제, 어떤 혼란, 어떤 어려움, 어떤 비극에 짓눌려 있는 사람이든 간에 자신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

제 친구 중에 외국에서 일하는 아주 훌륭한 목회자가 있습니다. 그는 핍박이 너무 심해지자 가족을 데리고 그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 정착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가는 길에 런던에 들렀다가 우연히 우리 교회 주일 오전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그들에 대해 들은 바도 없었고 아는 바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설교 중에 그들에게 직접 꽂히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남편이 아내를 돌아보았습니다. 아내도 남편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서로 "우리에게 주신 응답"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응답이란 새로운 나라로 갈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나라로 돌아가 무서운 핍박을 감내하며 정면에서 싸워 이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했고, 그 일로 영광을 누렸습니다. 저는 수년 후 그들의 입에서 이 말을 듣고 나서야 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경험을 할 때 우리는 "너무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려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상념"에 빠지게 됩니다.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

제가 들은 이야기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을 전하면서 이 부분을 마무리 짓고 싶습니다. 이것은 설교가 아니라 기도하던 중에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제가 아는 한 불쌍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무서운 죄의 삶을 살다가 회심하여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회심은 제가 남 웨일스에 있을 때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불행히도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다시 타락하여 깊은 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내와 자식들을 버리고 도망쳐서 다른 여자와 아주 형편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런던으로 가서 죄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돈이 떨어지자 집으로 돌아가 아내에게 거짓말을 해서 돈을 뜯어냈습니다. 공동명의로 되어 있던 집을 자기 소유로 변경하여 팔아넘긴 후에 돈을 챙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돈을 가지고 '먼 지방'으로 가서 무서운 죄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또 빈털털이가 되었고 같이 살던 여자에게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는 너무나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나머지 자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깊이 회개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자신을 용서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기 자신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고 가족들에게 돌아갈 염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다리로 가서 템즈 강에 투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심을 실행코자 길을 나섰습니다. 이 불쌍한 남자가 다리에 도착한 순간, 시계탑의 시계가 6시 30분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마음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 목사님(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이 지금 저녁예배를 드리려고 강단에 오르고 있겠구나!"

그는 생을 마감하기 전에 한 번 더 제 설교를 듣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6분 가량 걸리는 웨스트민스터 채플을 찾아와 계단을 밟고 중 2층으로 막 들어서는 순간, 이런 말이 들려왔습니다.

"신앙을 버리고 다시 타락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그것은 기도 중에 나온 말이었는데, 말 그대로 첫 번째로 그의 귀에 와서 꽂혔습니다. 그 즉시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았습니다. 그는 다시 회복되었을 뿐 아니라 런던 교회에 있는 한 교회의 장로가 되어 수년 동안 잘 섬겼습니다 (그는 이 연속 강의가 책으로 엮이기 전에 영광스러운 승리의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 윌리엄 케리 Willam Carey는 "하나님께 큰일을 구하라"고 했으며, 더 나아가 "하나님이 큰일 하실 것을 기대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놀라운 일이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일만큼 낭만적인 일은 없습니다. 그 길을 가다보면 수많은 벧엘을 만나게 될 것이며, 다음과 같은 프랜시스 톰슨 Francis aTompson의 시구를 거듭거듭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돌 하나만 들어올려도 천사의 날개가 퍼덕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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